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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요약정보 및 구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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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木板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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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6曲 / 後6曲
가로 26.5 * 세로 40.5cm
無界 / 全 6張


도산십이곡 [陶山十二曲]
조선 명종 때 이황(李滉)이 지은 12수의 연시조. 목판본이 도산서원(陶山書院)에 소장되어 있다. 저자는 이 작품을 전육곡(前六曲) · 후육곡(後六曲)의 둘로 나누고, 전육곡을 <언지(言志)>, 후육곡을 <언학(言學)>이라 붙였다. <언지>는 천석고황(泉石膏肓)의 강호은거(江湖隱居)를 읊었고, <언학>은 학문과 수양을 통한 성정(性情)의 순정(醇正)을 읊었다. 저자는 이 작품을 짓게 된 동기를 <도산십이곡발(陶山十二曲跋)>에서 "한림별곡류(翰林別曲類)는 긍호방탕(矜豪放蕩)하고 설만희압(褻慢戲狎)하여 군자의 숭상할 바가 아니다.", "이별육가(李鼈六歌)는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고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다. ", "국문시가는 한시(漢詩)와는 달라서 노래할 수 있어서 흥이 난다. "라고 말하였다. 첫째와 둘째는 기존의 시가에 대한 불만이고, 셋째는 국문시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한림별곡> · <관동별곡> · <죽계별곡(竹溪別曲)>의 한림별곡류는 고려 사대부의 풍류를 읊었는데 관능적이고 향락적이다. 저자는 이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배척하고, 그 대신 새로운 풍류를 제시하였으니, 즉 산수유상(山水遊賞)을 통하여 올바른 성정을 수양하여가는 일이다. 이별육가는 '은(隱)'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결신멸세(潔身蔑世)'의 오만스러운 내용이다. 저자는 이것을 배척하고, 조선 사대부에 맞는 '은'을 제시하였으니 "연하(煙霞)로 지블 삼고 풍월(風月)로 버들 사마/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늘거가/ 이 듕에 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의 천석고황이다. '은'에는 '결신'이 으레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겸선(謙善)'에 그쳐야지 '멸세'에 흘러서는 안된다. 저자는 특히 멸세의 오만을 경계한 것이다.

저자는 한시와 시조의 차이를 '영(詠)'과 '가(歌)'로서 파악하고, 가창이 낳는 흥에다가 시조의 존재이유를 설정하였다. 이것은 문학관으로서의 하나의 자각이다. 한시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흥을 시조에서 찾고, 그 흥을 매개로 하여 자기를 창조하는 그런 자각이다. 그 자각이 이 작품을 낳게 한 것이다. <도산십이곡>은 후세사림파(士林派) 시가의 중심적 지표가 되었다.